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백일 전투 (문단 편집) === [[페르디낭 포슈]]의 뛰어난 전략적 안목 === 백일 공세에 있어서 협상군 총사령관인 [[페르디낭 포슈]]의 전반적인 큰그림과 공격 컨셉은 당시 참호전을 풀어나갈 열쇠로 작용되었음은 분명했다. [[페르디낭 포슈]]는 지난 4년간 피를 흘리며 쌓아온 모든 노하우들과 현대화된 연합군을 총 집결시킨 대규모 파상 공세를 펼쳤다. 포슈는 협상국 수장들과의 회의에서 자신의 공세 전략을 몸짓으로 표현했는데, "오른쪽 펀치, 왼쪽 펀치, 다시 오른쪽 펀치, 그리고 강력한 킥!"으로 요약되는 이 몸짓은 향후 펼쳐보일 강력한 파상 공세를 아주 잘 암시한 행동이었다. 1차 세계 대전 후반에는 넓게 공격하는 방식이 저물고 깊게 공격하는 방식이 대세가 되어가고 있었는데, 후티어 전술의 독일군은 물론 프랑스군과 영국군 모두 병력을 깊게 배치하여 깊숙히 찔러 들어가는 한편 로테이션이 용이하게 이루어지도록 배치를 구성하고 있었다. 각종 신기술들[* 전차, 차량화 기동 포병, 항공기, 독가스, 화염방사기, 참호 박격포, 경기관총 등]의 발전과 응용으로 인해 공격은 더욱 세련되었으며, 전쟁 초기와 달리 후기에서는 참호를 뚫는 경우가 훨씬 비일비재했다. 이러한 돌파력의 상향에 힘입어, 포슈는 전선 여러곳에서 병력의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깊숙히 전선을 뚫고 들어가는 파상 공세 전략을 선보였다. 이는 독일군이 전선을 메우기도 전에 쉴새없이 찔러들어가고 압박하는 방식이었으며, 곳곳에서 전선이 뚫린 독일군은 후방이 노출되어 온갖 불리한 시뮬레이션이 나올 수 있기 때문에 좋든 싫든 전선 전체를 뒤로 빼는 수 밖에 없었다. 독일군이 전선을 빼는 과정에서 성급한 퇴각으로 인해 상당한 포로와 버려진 장비들이 발생하였으며,[* 실제로 10월 말에 협상군이 노획한 독일군 포로가 250,000명, 대포가 4,000문을 조금 넘는 정도였는데, 11월 5일에 독일군이 대퇴각을 벌이고 11월 11일에 보면 총 노획한 독일군 포로가 385,000명, 대포가 6,615문으로 수치가 대폭 올라갔다는 것이 보인다. 즉, 독일군이 한차례 대퇴각전을 거칠 때마다 상당한 손실이 발생했다는 뜻.] 더불어 독일군이 장악하고 있던 프랑스/벨기에 땅도 조금씩 토해내면서 협상 카드를 잃어가고 있었다. 특히, 전선 여러곳에서 찔러 들어갈 때 보면 주로 철도 교차로와 같은 주요 교통 요충지를 찔렀으며, 더불어 협상군의 폭격까지 겹치면서 독일군의 교통망이 극도로 마비되었다는 점도 퇴각전에서 상당한 손실을 유도하게 해주었다. 실제로 영프연합군의 폭격기는 독일군의 철로와 퇴각하는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폭격했다. ~~그리고 프로파간다 종이도 뿌렸다~~ 포슈는 과거 [[로베르 니벨]]이나 독일군이 사용했던 전략적 돌파[* [[제2차 세계 대전]]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 국방군|나치 독일군]]이 쓴 방식과 비슷하다.]가 당시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니벨 공세]]와 [[춘계 공세]]에서 봐도 전략적으로 실패한 싸움이다.] 더불어 넓은 전선에 걸쳐 균등한 병력으로 밀고 들어가는 산개전 또한 효율이 상당히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이 둘의 단점을 상쇄한 파상 공세 전략으로 독일군의 피를 무자비하게 뽑아낸 것이다. 물론, 백일 공세의 공이 모두 [[페르디낭 포슈]]의 공은 아니다. 수많은 유능한 야전 사령관들과 포슈를 정치적으로 보호해준 [[조르주 클레망소]], 그리고 미국의 비전투물자 지원과 영국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프랑스만의 힘으로는 실행 불가능한 공세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가장 최선의 공세 전략으로 독일군을 무너뜨리는데 크게 일조한 포슈의 전략적 안목이 [[배후중상설]]과 미국의 도움이라는 이유로 부정되어서는 안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